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종 무열왕 (문단 편집) == 여담 == * [[김유신]]과 [[정치]]적으로 [[동맹]] 관계였으며 나중에는 그의 여동생 [[문명왕후|문희]]와 혼인도 했다. 이후 김춘추의 3녀 [[지소부인]](智炤夫人)은 김유신에게 시집간다. * 한편 '''기록상으로는 [[조선]] 왕실의 [[가문]]인 [[전주 이씨]] 가계의 외가 조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신라)|이한]](李翰)은 태종 무열왕의 10세손인 김은의(金殷義)[* 이 김은의라는 인물은 [[정사(역사)|정사]]에 나오는 [[김인위]]의 다른 표기로 보인다.]의 딸과 혼인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 <총서> 1권) 및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에 나와 있다. 실제로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학계의 주 의견인데 이렇게 [[성씨]]와 가계 [[족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고려]] 중기 이후이기 때문이다. 즉, 조선 왕실에서 가문의 [[이름]]값을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태종 무열왕의 가계와 연결시켰다는 [[해석]]이 성립하는 것. 물론 전주 이씨가 기어코 이한의 [[무덤]]을 찾으려 했고, 실제로도 있어서 실존 인물일 가능성도 있기에 진짜로 혼인했을 수도 있기는 하다. * [[한국사]] 관련 [[시험]]에서 악랄하게 출제된다면 [[백제]]의 [[무령왕]]과 이름이 비슷한 사유를 엮어 혼선을 준다. [[무령왕릉]] [[사진]]을 제시하고 [[무열왕릉]]이라고 한다는지, 무령왕의 업적 중 하나인 22담로 설치를 두고 '무열왕이 22담로를 설치했다'라고 말장난을 치는 부분이 관건이었다. 고전적으로 변별력을 뒀던 부분이라 이제 [[수험생]]들도 잘 낚이지 않는 편. * 개인적 원한으로는 다름아닌 김춘추 가문이 백제와 그 백제 유민들을 가장 미워하고 탄압했어야 정상인데, 기이하게도 김춘추의 직계 혈손들인 무열왕계 임금들은 문무왕부터 시작하여 '''예외 없이 백제 유민 포섭에 대대로 모두 적극적'''이었다. 개인적 원한은 원한이고, 김춘추 왕가와 신라가 오래 가려면 백제 구성원에 대한 비이성적 탄압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어떤 공감대가 이들에게 대대로 내려왔을 개연성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무열왕계 왕실을 끝장내고 등장하는 원성왕계 왕실에게 반대하는 [[김헌창의 난]]이 옛 백제 지역에서 큰 지지를 받았던 건 시사하는 점이 크다. 한편 무열왕계 왕실 다음에 등장하는 원성왕계 왕실이, 옛 백제 지역에 대한 유화책과 포용책에 고심했던 무열왕계 왕실의 고민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도 역시 후세인에게는 기이한 점이다. 원성왕계 왕실은 옛 백제 지역보다는 [[패서]] 일대의 반란 가능성을 더 신경썼다.[* 패서에 근거를 둔 세력이 결국 삼한 재통합을 이룩하게 된다는 걸 고려하면 딱히 틀린 예측은 아니었지만, 이런 방심이 쌓이고 쌓인 다음 견훤이라는 신라군 내부 이단아와 만나 폭발하게 되자 서라벌과 신라 왕실은 최악의 시련과 탄압을 맞이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